이슬 같은 은혜
경북 봉화 아연 광산 사고로 고립되었던 작업자 두 명의 예에서 보듯, 사람은 물리적 어둠에 갇혀도 절망에 빠지지만, 영적 어둠에 갇힌 절망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 빛을 찾지 못하면 육신의 생명 줄 좀 늘리는 것으로는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이런 변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빛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요, 이 세상에서부터 영원을 바라보고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도스또예프스키의 소설 ‘대 심판관'(Great Inquisitor)에 심판관이 예수님을 심문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너는 인간을 너무 존귀한 존재로 과대평가하고 있다. 인간은 빵만 쥐어주면 누구에게나 복종하는데 자유가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냐?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도 결국 그 자유를 발아래 내동댕이치고 다시 노예로 삼아 달라고 애걸복걸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삭개오 같이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자 절박하게 몸부림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걸 보면 부자로 산다는 것과 행복하게 산다는 말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삭개오는 분명히 부자였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행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었고 심지어 깊은 고독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데, 그는 군중 속에서 살았지만, 고독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주변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마음 열고 속사정까지 나눌 사람은 없었습니다. 물론 기쁨을 함께 하는 사람도 없었고 경쟁과 대립 관계의 사람들 뿐, 그는 철저히 혼자였습니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정신질환의 원인이 된다는 연구결과가 있는데, 삭개오의 상태가 아마드 그랬을 것입니다. 그는 숨 막히는 이런 현실에서 구원받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갈망은 누군가로부터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되면서 더욱 강렬해 졌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의 이 결심은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생존의 문제만큼 절실했던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일에는 방법이 보이고, 하기 싫은 일에는 변명만 보인다!” 문제에 봉착하자 더 절박해진 삭개오는 그 상황에서 주님을 만날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그의 눈에 군중들 머리 위로 드리워진 뽕나무가 들어왔고 그는 바로 올라갔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눅19:5). 삭개오가 쉽지 않은 결단을 하고 뽕나무에 오른 것을 아신 주님 역시 쉽지 않은 결단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이 세리의 집에 묵는 것은 당시 유대 관습으로는 파격적인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의 비난보다 죄인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기 원하셨고, 그 일은 그 날 바로 이루어졌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19:8). 이는 삭개오가 주님으로부터 진리의 말씀을 듣고 살아났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삭개오에게 그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라고 위협하거나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말씀으로 살아난 후 그를 사로잡고 있던 물질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삭개오가 이 말씀을 듣게 된 시점이 중요합니다. 그가‘물질의 벽’을 넘는 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점이 우리의 구원과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빛의 자녀답게 사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