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무엇 때문에 사나?>
올 2월에 소천한 고 이어령 교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글로 남겼습니다. 그 중에 암이 온 몸에 퍼져서 큰 고통가운데 죽음의 그림자를 보며 쓴 글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깃털은 흔들린다. 날고 싶어서/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공깃돌은 흔들린다. 구르고 싶어서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내 마음은 흔들린다. 살고 싶어서… 이어령 교수가 삶의 연을 놓지 못해서 흔들린다고 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이 시는 죽음을 직감한 그가 영생에 들어가기 전에 이 세상에 대한 연민을 표현한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마22:32).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출애굽기 3:6절 말씀을 인용하신 것으로 여기에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여기에 쓰인 동사 히브리어‘에이미’라는 단어인데, 그 시제가 현재형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고 계신 그 시점을 기준으로, 5백 년 전에 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지금 모세와 하나님과 대화하는 그 시간, 하나님 앞에 살아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사두개인들에게 내세의 삶과 부활을 증거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다시 이 사실을 강조하시며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22:32). 당시 하나님과 대화 하고 있던 모세만 산 자가 아니라 아브라함, 야곱, 이삭 모두 산 자라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아브라함 야곱 이삭이 어떻게 ‘산 자’란 말일까요? 그들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살아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참 생명입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여기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이란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거하는 자들로 ‘산 자’들입니다. ‘산 자’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그는 그 안에 거하게 되어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산 자’는 진리의 말씀대로 살기에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칼빈이 정의한 자유를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유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고, 우리가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 의지(意志)의 능력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진리와 자유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즉 ‘진리를 안다’는 말은 단지 지식적인 차원의 ‘앎’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행함’이 병행되는 ‘앎’으로, 그런 진리가 사람을 자유케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눅23:18).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려 환호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를 환호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저주하는 소리만 들립니다. 대중이 ‘바라바를 놓아 주소서’하는 소리에 그들의 소리는 묻히고 만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놓아달라고 외치는 것은 무리로부터 외면당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진리 안에 ‘산 자’가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영이 죽은 자는 환경과 상황에 지배를 받아 진리를 외면하고 자기를 합리화할 뿐입니다.
수레 만드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부귀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수레를 많이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관 만드는 사람은 사람들이 많이 죽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관을 많이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수레 만드는 사람은 본디 착하고 관을 만드는 사람은 본디 악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그 마음이 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산 자는 누구입니까? 이런 이해관계를 넘어 진리를 살아내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