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걸음

 

여러분은 현재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요? 직업, 직위, 가치관, 관심사, 성격… 또 자신이 장차 어떤 존재로 되어 있을 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셨는지요? 지금 나의 나 된 것과 앞으로 나의 나 될 것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이 있는데, 심리학자들이나 정신 분석학자들은 그것을 그 사람이 자라온 환경적 유전적 요소 등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이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설명하는데,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라는 영적인 차원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3,24).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정해 놓으신 걸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우리가 <사명>을 논할 때 우리가 감당하는 사역을 세 가지 관점에서 점검해야 합니다. 즉, 준비된 일인지, 옳은 일인지, 잘 할 수 있는 일인지를 질문하고 예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예로, 하나님이 바울을 위해 정하신 <걸음>은 이방 임금과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런 사명을 맡기신 것은 그가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 학자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는 점과 그가 이방 지역인 다소 출신으로 헬라어에 능통하였기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메시야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언어의 문제가 없었다고 해도, 그가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길은 하나님이 그에게 정해주신 그가 걸어가야 할 ‘걸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사흘간 앞을 보지 못하는 신비한 경험하게 하셨는데,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에 정통했던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과 오롯이 함께 한 그 사흘이라는 기간, 예언서에 예언되어 온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신하였고, 그 후 그는 어떤 고난과 핍박에도 흔들림 없이 예수를 주로 전하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사람이 추억/경험을 위해 돈을 쓰는 경우와 물건을 위해 돈을 쓰는 경우, 그 행복감의 차이 큽니다. 한 예로, 3년 전에 산 옷을 보고 있는 사람과  3년 전에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가서 여러 추억을 담은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행복감은 차원이 다릅니다. 바울이 주님과 함께 한 삼일의 시간은 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옳은 일’에 헌신하게 한 잊지 못할 순간이었습니다. 그 일 후에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걸음>이라고 확신하여, 좌고우면하지 않고 그 길을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목욕탕 탈의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구가 있습니다. “귀중품은 카운터에 맡기십시오. 맡기지 않은 것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정하신 걸음을 걷는 이들이 마음에 새겨두어야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그 길을 걷는 사람은 하나님께 다 맡기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을 보면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선언하고, 실제로 자기에게 정해진 길을 걸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기뻐하여 그가 달려갈 길을 다가도록 그의 ‘걸음’에 항상 동행하시면서 그가 사명을 다 감당할 수 있게 도우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