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면서 여러 형태의 고난이 겪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임하는 고난은,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그 자체로 <선이나 악이다> 말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12:6,8).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며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죄로 관영한 세상에서 물질적/ 육체적/ 정신적인 고난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난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숙명인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람은 그가 겪는 고난의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이 담아두신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는 기회로 삼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얼마 전에 소천한 이어령 교수가 그의 글에서 자주 인용했던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이란 라는 라틴어 격언은 의미가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는 ‘언제가 죽는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뜻이고 ‘카르페 디엠’은 현재에 최선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한편 죽음을 생각하라는 것은 인생을 회의적으로 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 있게 살라는 뜻이요, 현재를 즐기라는 말은 육신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이 두 격언에는 매일 주어지는 삶과 언젠가 맞이할 게 될 죽음을 대하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2:19).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해 부끄러운 고난을 당해도 억울하다고 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누가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면서 참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사도는 이렇게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라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말과 ‘아름다운 일이라’는 말의 의미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의 사정을 아신다’는 생각을 하라는 뜻입니다. 또 ‘아름답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된 상태를 의미하는데,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그대로 되니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3,4). 이처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은 그 고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원을 하는 이들은 갓 모종한 화초 주위로 큰 화분을 빙 둘러서 그늘지게 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이는 그 화초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주위를 어둡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고난이란 ‘어둠’을 허락하심은 우리의 믿음이 주께 뿌리내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서 주님을 닮아가며 믿음이 성숙해 지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요셉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자기만 아는 부당한 고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억울하다고 자기감정대로 하며 고난에 저항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고난을 통해 택한 사람들이 당신을 더욱 더 의지하게 만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황태와 같다!’ 한 겨울 밤의 칼바람과 정오의 볕을 받는 중에 맛이 깊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