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마이애미 지역에는 수많은 비치가 있는데, 다 나름대로 아름답습니다. 어디가 가장 좋고 그 다음은 또 어디이고 하는 식의 순위 매김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휴양지로 개발된 비치는 그 나름대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비치는 또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알아주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인생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모든 삶은 그 자체로 귀합니다. 신자라면 그 각각의 인생에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외적 모습이 아니라 그 내면을 보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1:25). 세상에는 여러 가지 직책이 있는데, 신자에게 가장 존귀한 직책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직분입니다. 사람에 의해 임명되는 세상 직책과 달리, 이 직분은 주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을 그렇게 인식했고 그 목적이 말씀을 이루는 것으로 바로 알았습니다. 흔히 성직자만 주께서 임명하는 것으로 알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모두 주께서 세운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께서 주시는 직분에 부여된 사명을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직분자는 성도를 온전케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려면 스스로 온전해야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려면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려면 스스로 맡은 역할을 충실히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를 합해 직분의 목적을 말하자면 한 마디로 ‘섬기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자 키엘 케고르는 당시 기독교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 그런데 교회는 더 엄청난 일을 했다. 포도주를 물로 바꾼 것이다.” 그는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를 냉소적으로 비난한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자아가 죽을 때 가능한 ‘섬김’에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이처럼 구원받은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곧 각자 주어진 섬김의 십자가를 감당해야합니다. 간혹 ‘자기가 맡은 사역이 크네 작으네’하며 불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사역을 ‘직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직분자들이 사역을 행할 때 그 일의 크기를 세상 직위로 생각하여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영생이란 가장 큰 선물을 받았으므로, 이제 이 세상에 더 사는 것을 덤으로 여기고 주님처럼 섬김으로 복음을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