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맛에 사는 이들이 있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보이려고 사는 사람은 늘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뭔가 보여줄 것을 찾아 헤매며 피곤하게 삽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목적인 사람들은 진정 평안한 삶과 행복한 삶은 누리지 못합니다. 삶의 보상만을 바라보며 죽기 살기로 살다보니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주께서 주신 일상의 복을 인식하고 감사하며 삽니다. 그들은 세상 일로 지나치게 근심/염려하지 않으며. 세상의 지위,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신령한 일을 감당하며 삽니다.
요즘은 초등학교에서도 아이들끼리 욕을 많이 한다는데, 한 엄마가 묻자“욕이 파워야!”하더랍니다. 욕 잘하는 아이가 힘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눌리지 않으려고 욕을 해댄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끄러움이나 죄의식도 없이 단지 파워 있게 보이기 위해 욕을 해대듯이, 세상 사람들은 깊은 생각 없이 세상의 파워만을 얻기 위해 사는 듯합니다. 사람이 중생하지 못하면 누구나 이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예수님은 거듭난 사람을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 했고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사람>이란 말은 <삶>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삶이란 <살다>와 <알다>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살면서 알아 가는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살아가면서 정말 알아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천국의 실체입니다. 예수님은 한 밤중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당신께 나온 니고데모가 이 세계를 보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표적에만 관심이 있었던 그에게 거듭남의 비밀을 말씀하시면서 그의 관심이 하늘나라로 바뀌어지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오병이어 사역팀의 한 권사님이 “나는 하나님께 가져가지 못하는 것에는 투자 안 해”라고 하셨답니다. 단톡에 올라온 이 감동적인 말씀을 듣고 언젠가 읽었던 한 글귀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먼저 보낼 수는 있습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19:39,40). 니고데모도 이 말대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성령으로 거듭난 신바람 난 사람임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바람 소리는 들어도 방향을 알 수 없듯, 성령으로 난 니고데모도 그리했던 것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43:19).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당신께 나오는 사람을 위해 지금도 생각지 못한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신바람으로 일하는 사람에게는 절망이나 실패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바람이 나서 일하면 자기 능력 이상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바람 난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데, 바람을 일으킨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애벌레는 길에 늘어선 것들이 다 문제 거리가 되지만, 나비에게는 그 모든 것이 구경거리일 뿐입니다.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순간 이전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성령의 바람, 신바람을 맞아 이렇듯 존재론적으로 변화되어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