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4월 8일 주일, 독일 신앙인의 양심인 본회퍼 목사가 감옥에서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아침, 본회퍼 목사님과 한 방에 수감되었던 한 영국장교가 인사했습니다. “목사님, 마지막이네요. 안녕히 가십시오!” 이에 본회퍼 목사님이 그에게 한 대답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아닙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절대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전혀 새로운, 그러면서도 놀랍고 영광스러운 새 삶의 시작일 뿐입니다.
아담 이후 인간은 죄의 노예가 되어 사망이 드리우는 두려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리고 사망의 두려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생존을 위해 양심을 버리고 거짓되게 살게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 관련해서 그리스도 밖에 사는 인간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히2:15). 이렇듯 죽음은 지금도 그리스도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이런 상황은 반전을 이루게 됩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주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어 죽음을 대면하며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고 이어령 박사는 죽음이 추상명사가 아니라 물건 이름처럼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던지면 깨질 수 있는 유리그릇 같이 아주 구체적인 명사로 내 앞으로 왔다고 했습니다. 이어령 박사는 임종 전에 제자 김지수와 만나 자신이 죽음에 대해 사색한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최근 그 내용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 책에서 이 박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타인의 죽음이 동물원 철창 속 호랑이라면 내 죽음은 철창을 나와 덤벼드는 호랑이이다…전두엽으로 생각하는 죽음과 척추 신경으로 감각하는 죽음은 이토록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는 철창 밖의 호랑이 같이 다가오는 그 죽음을 향해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외치며 죽음을 직시하며 죽음에 대한 사색을 글로 남겼고 평소 소망하던 대로 잠든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활신앙 위에 굳게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은 예수님의 부활의 신비를 보여주는 계절입니다. 봄에는 만물이 소생합니다. 그 길고 추운 겨울을 지나며 얼었던 땅도 생명의 기운을 막지 못합니다. 이른 봄, 언 땅을 뚫고 솟아나는 새싹을 보면 그런 생명의 신비함과 위대함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래서 생명이신 예수님은 어두운 무덤에 갇혀 계실 수 없었습니다. 폭발적인 생명의 능력으로 사망 권세를 깨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로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었다'(고전15:54)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사는 자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만 있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
어릴 때부터 사물에 대한 관심이 많아 유난히 질문을 많이 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아이가 아빠와 함께 도심을 벗어나 시골 길을 걸어가는데 궁금한 게 많아 물었습니다. “아빠, 저기 저 사람들 뭐하는 거야?” 아빠가 대답했습니다. “아, 그건 벼 심는 거란다.” “아빠 저건 뭐야?” “고추 밭이야.” 그러자 아이가 말합니다. “아, 사람들이 고추를 심었구나.” 이렇게 아이는 궁금한 걸 계속 물으면 갔는데, 공동묘지 앞을 지날 때였습니다. “아빠, 저건 뭐야?” “저긴 죽은 사람을 묻어 놓은 곳이란다.” 그때 아이가 뜻밖의 말을 합니다. “아, 저건 사람을 심은 거구나.” 철없는 아이의 말을 듣는 순간 아빠의 마음에 섬광처럼 계시의 메시지가 임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묻는 것이 아니고 심는 것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