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열등감 없이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세상에는 열등감을 극복한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사실 인간의 열등의식은 출생할 때부터 그 내면에 뿌리내린 어두운 감정입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의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늘 어둔 그림자가 드리워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극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하는 모든 일은 감정적으로 흐르게 되어 끝이 좋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들은 육신을 따르는 자로 육신의 생각을 하며, 육신의 생각은 사망(롬6:6)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 하에서 주신 은사로 감당할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25:15). 여기서 주인이 종들의 ‘재능대로’ 차등을 두고 달란트를 맡긴 것은 철저히 그의 주권에 해당되는 일입니다. 주인은 종들을 파악하고 그 능력에 맞게 달란트를 맡긴 것으로 종은 주인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와 관련된 좋은 예가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게 된 일화일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행11:22-24). 이렇듯 바나바는 사도들이 파견한 사람으로 권위가 있었고, 그의 합류로 교회는 더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교회가 크게 부흥하던 그 때 한계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을 복음으로 무장시킬 수 있는 은사가 자기에게 부족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크게 결단하고 한 일이 이것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5,26). 그러니까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지게 된 것은 바나바가 자기를 비우고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제자들을 가르치도록 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작가 함철훈이 “몸을 낮추니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는데, 바나바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고 사랑하였으며 하나님의 교회가 잘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했기에 자신을 낮출 수 있었고 그로인해 안디옥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이 아름답게 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9일, 베이징 올림픽에서 쇼트트랙의 황대헌 선수가 1500m 경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앞선 1000m에서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실격을 당해 금메달을 놓친 후의 경기여서 관심이 많았는데, 황 선수는 “경기의 판정은 심판의 몫이다”이라며 자신의 위치를 지켜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았기에 이런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남기며 사는 사람의 공통점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서야 할 자리를 분명히 알기에, 어떤 경우든 선을 넘지 않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 바울이 스스로 종이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주 안에서 거듭난 이후 자기 위치를 분명히 인식하고 남기는 삶에 모든 것을 건 것입니다.